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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기지촌 여성' 그들에게 국가는 포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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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진촌(鎭村)을 기원으로 조선시대의 성곽취락 등도 군사취락에 포함되지만, 현대적 의미의 기지촌은 일제강점기에 신용산·진해·나남 등 일본군 주둔지가 형성되면서부터이다. 6·25전쟁 이후에는 파주와 포천 등을 중심으로 한 서부 휴전선 남쪽의 주요미군기지에 한국 주둔 미군을 상대로 한 매춘부·군납업자·상인 등 소비적인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모여 기지촌을 형성하면서 번창하기 시작했으나 현재는 주한미군의 감축 및 철수로 쇠퇴일로에 있다.-다음 사전출처-

 

기지촌의 유래와 과거의 의미와는 다소 다르지만 1945년 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기지촌은 '가족의 생계 유지를 해야 하거나 먹고 잠잘 곳이 없어 머무는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처 6.25 전쟁 이후에는 미군을 상대로 여성들의 매춘이나 서비스 활동을 하면서 생계유지를 해왔다. 나라가 전쟁중이었고 모든것이 폐허가 되었을 당시 먹고살기 힘들어 택했던 기지촌에서의 삶은 자의가아닌 타의에의해 어쩔수 없이 행해졌던 직업이었을 것이다. 국가에서는 그들을 민간외교라는 말도안되는 용어로 비화하기도 했다.

 

 

"외국인들(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들이 참 그 피해를 많이봐 ... 그래서 색시들이 참 많이 죽어. 목 눌러 죽이고, 두들겨 패서 죽이고. 우리는 죽으면 신문에도 안 나와.라디오에도 텔리비젼에도 안 나오고. 그 까짓 거 양공주, 양색시 죽으면 뭐 좋지않게 인정들 하니까. 우리나라 지키고 가정 지켜준 생각은 안하고 양갈보니 뭐 욕을 하고 가고 그랬다고 그 전에" (기지촌여성 신모씨의 증언)

 

 

 

 

 

정신대,위안부와는 다르게 그들의 사회적인 관심이나 지원은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위안부 여성들에대해서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있다. 지난 4월 국회에서는 '위안부 피해자 생화안정'에대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또한 기념사업도 추진중이다. 그에따라 정부에서는 그들에대한 지원과 보호를 하게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조적으로 과거 6.25전쟁중 피해를 입은 기지촌 여성들에대한 정부의 관심과 지원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이 그렇게 밖에 살아갈 수 없었던 이유를 국가에서는 더이상 생각하지않고 외면하고 있다.

 

 

꿈 많고 하고싶은게 많았던 소녀..죽지 못해 살고있는 그들.

 

그동안 기지촌 여성들을 기억하고자 사회에서는 간간히 연극과 토론회를 가졌다. 그러나 실제 그들의 삶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공연이나 책이 출간이 되어도 사람들에게는 그냥 그런사람도 있었구나..라고 잠시 생각이 들었을 뿐 이었다. 지금은 모두 할머니들이 되신 그들역시 당시에는 꿈도 많고 하고싶은 일도 많았던 여리고여린 여성들이었다.

 

 

45년 동안 산 안정리서 죽으려 했지만 죽지 못했다

안정리에 온 여성들은 그렇게 '기지촌 여성'이 됐다. 사람들은 그들을 '양공주'라 불렀다. 포주들의 장부에 오른 기지촌 여성만 500명이 넘었다. 어느 누구는 기지촌 여성이 모두 2000명이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3000명이라고 했다. 그들은 돈이 없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포주에게 돈을 갚기 위해, 클럽에서 미군을 유혹해 돈을 벌었다. 파라다이스, 유엔, 폴리, 피콕, 아리랑 등 수없이 많은 클럽이 생기고 없어졌다. 세븐 클럽이 제일 잘 나갔다.

몸이 아파도 포주는 일을 시켰다. 포주는 그들에게 강제로 마약을 먹였다. 아픈 줄도 모르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성매매를 했다. 나라에서는 보건소를 통해 그들의 성병을 관리했다. 그리고 그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 칭했다.

- 군산에서 식모살이를 하다 서울로 올라왔다는 이덕희 할머니- 오마이뉴스 출처

 

 

 

 

국가는 그들에게있어서 포주였다.

 

자료에의하면 송탄의 경우 1970년대 후반. 약 2500여명의 '매춘 여성'을 비롯해 6만 명의 주민 중 80%가 미 군대로부터 벌어들인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국가는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기위해 기지촌의 존재는 불가피한 것이 되었고, 닉슨 독트린으로 주한미군의 철수가 가시화되고 미국측의 요구가 제기되자 1971년부터 1976년까지 5년간 정부 주오로 '기지촌 정화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국가의 이같은 행동은 겉과속이 다른 태도였다. 한국정부는 이들은 '민간외교관'이라는 보기좋은 말로 비화하면서 한국안보에대한 미국의 약속을 재확인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했고 주한미군의 주둔을 필사적으로 연장시키려했다는 일련의 공문서가있음으로 이는 분명 국가는 그들에게 포주의 역활을 톡톡히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국가는 그들에게 관심과 인정을 해주어야 한다.

 

당시 주한미군에 의지하며 국가의 안보를 유지하고있어던 정부는 기지촌 여성들에게 '산업의 역군' '민간외교관'이라고 칭송을 하며 한국과미국의 대리 역활을 잘 하고있다는 칭찬까지 받았다. 그런 말도안되는 명분으로 그들을 주한미군의 노리개감으로  놔두었다. 국가는 기지촌 여성들을 억압과 착취로 이용했음에도 지금 그들의 삶은 굶주리고 더이상 희망이 없고 가난과 외로움을 벗어나지 못 하고있다. 정전협정 60년이 되는 현재까지 그들은 사회어디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 하고 외면 받고있다. 국가는 그들도 피해자임을 잊지말고 관심과 보호를 해주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역시 솔직히 그들에관해 자세히 알지는 못 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국가가 국가의 안보를 위해 그런 말도안되는 태도를 취했고 지금역시 관심 밖에 두고 있는것에대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국가 인권위원회의 주한미군의 범죄근절을위한 학술토론회에서 다루어지고 있을뿐이다. 과거 기지촌여성들의 삶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역시 주한미군의 범죄행위는 벌어지고있고 과거에도 범죄행위와 불법행위는 일어나고있었다. 그에 맞서 국가는 더이상 억울하게 당하거나 정당한 처벌을 받지않고 버졋이 활개를 치고있는 그들을 좌시하지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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